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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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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와 와인 여행의 시작은 춘천이었다. 서울에 사는 나는 청춘열차 itx를 타고 남춘천역에 내렸고 안산에 사는 동생은 버스를 타고 춘천터미널에 내려서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창원에서부터 춘천까지, 거의 400km를 안 쉬고 4시간을 내달려 우리를 픽업하러 오는 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가족은 넷인데 집은 세 채나 되는, 집이 많은 가족이다. 고등학교가 집에서 멀었던 나는 그때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자연스레 독립을 했다. 이제는 10년 차 프로 자취인이 되었다. 동생도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을 서울로 와 나랑 같이 살 줄 알았지만 안산에 있는 캠퍼스로 가게 되면서 우리는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아빠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리바리 싸 온 짐이 무겁게 느..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그날 밤을 기억한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 내 몸 위에 얹힌 무거운 그의 허벅지. 그 사람은 아주 큰 숨을 코로 골았고, 큰 입술 사이로 뱉어내는 숨에는 술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리고 자주 뒤척이며 가끔 손으로 얼굴을 벅벅 긁어댔다. 저러니 피부가 안 좋을 수밖에 –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이 사람과 자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하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엄마 일생에 남자는 아빠밖에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21살 아빠를 처음 만나 6년을 연애하고 27살에 결혼을 했다며 아쉬워하는 엄마 표정을 보면 진실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옆에서 의뭉스럽게 웃고 있는 아빠를 보면, 아마 아빠는 엄마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엄마와는 달리 사랑이..
내가 아는 하나 내가 아는 하나 * 하나, 분명 하나였다. 7년이 지났어도, 힘주어 불러야지만 들릴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분명 하나였다. 그해 처음으로 쌀쌀함이 느껴졌던 밤, 뒤에서 지켜보았던 하나의 걸음걸이, 오른쪽보다 왼쪽 걸음이 살짝 느린 엇박 걸음. 여전히 하나는 그렇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가 여기에, 왜, 무슨 연유로.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생긴다. 아무리 관광객이 많은 광화문 근처라 해도, 평범한 결혼식장까지 관광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웃는다거나, 얘기를 나눈다거나, 핸드폰을 본다거나, 사진을 찍는다는 둥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가에 멈춰 선 하나의 얼굴에 채광이 들어 마치 얼굴에 얼룩이 진 듯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부님 측 친구분들, 사진..
티마이오스 『티마이오스』 요약 도입부의 대화 책의 도입부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뒤의 본편 부터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로 구성되고 있다. 도입부의 대화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전 날의 논의를 요약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크리티아스라는 등장인물이 아테나와 아틀란티스의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티마이오스의 이야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티마이오스의 연설에 앞서서 기도를 하고 논의 원칙을 설정한다. 또한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알려준다. 티마이오스의 논의 원칙 첫 번째는 존재론적 분리이다. 언제나 있는 반면 생겨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되 결코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47페이지 그리고 두 번째는 논의 원칙은 생성의 원인에 관해서인데 제작자와 본의 관계..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참을 수 없는 무거움 하품이 남아도는 나는 무거운 것들을 데워서 충분히 가벼워지면 따뜻함, 가끔은 뜨거움을 토해냈다 잇 속은 모두 썩어있었지만 일종의 거뭇함도 묻어있지 않은 어느 정도의 회끼도 돌지 않는 어떤 더러운 냄새도 나지 않는 숨이었다 필요한 것은 취할 수 없고 쓸모없는 것이 가득한 세계의 호흡, 방식 누군가는 잠의 시작, 끝, 혹은 언저리라고 누군가는 지루함의 한숨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웃음에는 하품이 없고 하품에는 눈물이 있으며 울음에는 하품이 없고 웃음에는 눈물이 있다는 역설 역설을 아는 자들은 둥글게 벌어지는 입을 보면 눈을 내려 자꾸만 닦아댔다 모서리를, 닦아도 둥글어지지 않으니 나는 괜찮다 하고 싶은데 입은 삐걱거리며 혀끝은 밀린 하품을 밀어내고 ⓒ 2018 YOOJIN CHOI all..
동해바다 푸른마녀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하곤 해.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을 자신조차 의심할 만한 그런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게 되는 거지. 더 늦기 전에, 기억의 색이 바래기 전에 너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나는 여름이 되면 바다에 살았어. 키가 큰 우리 숙모는 동해바다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하고 계셨거든. 바다가 데워지면 수영을 하고, 모래성을 만들고 심심하면 조개를 줍거나 게를 잡기도 했지.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돌아와 짠맛이 나는 몸을 씻어내고 바다 내음이 나는 밥을 먹었어. 비밀이지만 식당을 하시는 숙모의 밥은 엄마 밥보다 맛있었지. 특히나 바다에서 돌아와 먹는 저녁밥은 정말 최고였어. 그날도 그런 평화로운 여름날 중 하루였어. 이 동네의 바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
시초는 종말이 되어 시초는 종말이 되어 하늘색이어서 하늘이던 하늘이 일순간 노랗게 변한 것은 해의 출몰과는 관련이 없는 한 낮 오후 2시의 일이었다 다소곳하던 사람들도 무서워하던 사람들도 얼굴이 없는 사람들도 걷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 노란 하늘 아래서 숨 쉴 수 없이 노래졌다 사람들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혹자는 우리는 노란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이미 물들어버린 언어를 뱉었다 괜찮아 강한 것은 밤이라고 밤은 검정색이어야만 하니까 했지만 그림자를 삼켜내고 노란 빛이 스며들었다 달의 마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노란색이어서 잊지 않는 사람들은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어도 자꾸만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노란 하늘 아래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고 나무는 자라고 꽃들은 노랗게 익었다 ..
훔친 꿈 훔친 꿈 “이번 어린이 꿈 대회 상영작은 이혁우 어린이의 꿈입니다! 이혁우 어린이는 이번이 두 번째 수상으로 저희의 예상을 뛰어넘는….” 또, 또, 또! 떨어졌다. 꿈 학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고, 엄마를 졸라서 저번 달엔 꿈 과외도 받았다. 그런데도 누구는 꿈 트로피를 두 번이나 받고, 나는 본심에도 오르질 못했다.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혁우는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우리 꿈 학원도 다니질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엄청난 꿈 전문가에게 비밀과외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 “야! 이혁우! 너 비밀과외 받는 거 맞잖아! 나도 너 과외 쌤 좀 소개해주라. 어?” “말했잖아~ 나 과외 같은 거 안 받는다고. 그런 거 받는다고 꿈을 잘 꾸냐?” 저, 저 얄미운 것. 미워 죽겠지만 정보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