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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열쇠3. 북해(北海)상에 좁고 길게 이어져 있는 저평(低平)한 제도.
○○○○제도.
두 번째 글자가 ‘리’인 네 글자 단어를 찾아 넣었다. 프리지아제도. 네덜란드에서 독일을 거쳐 덴마크의 난바다에까지 분포해있는 섬 무리이다. 문제를 내고 나니,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프리지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프리지아는 (내가 기억하는 한) 나에게 첫 꽃이었다. 내가 꽃을 처음 본, 프리지아를 처음 본 그 공간은 백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준’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의 준이었다.
3년 전, 우리가 처음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나는 준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지금이 몇 년도인지, 왜인지, 그리고 너는 누구인지 물었다. 준은 눈동자에 특유의 쉼표를 띄우고는 내가 한 질문들 중 ‘너는 누구인지’에 대해 답하기 시작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처음 기억이 언제인지, 나는 몇 년의 세월을 기억하는지가 중요하지. 아, 그렇게 되면 너는 한 살이 되려나.”
하고는 웃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23년 전, 소란을 기억해. 그게 내 첫 기억.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고, 사람이 많았던 것, 그 많던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만 기억 나. 그리고는 나도 소란에 동참하려 큰 울음을 터뜨렸던 것 같기도 하고….”
준은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위해 기억의 족보를 훑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였다. 오름차순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이거나, 자신의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준은 후자의 사람이었다. 종종 과거를 반복하기도 했고, 순서를 바꿔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분명한근거는 준에게 현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나는 십자말풀이를 만드는 사람이다. 작은 여행 월간지에 끼워질 (이를테면 나라 이름, 유적지, 문화재 때론 여행 장비정도의) 여행과 관련 된 단어들로 구성 된 십자말풀이다. 29단어에서 32단어 정도로 구성 된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을 선택하고 단어를 배치한다. 단어를 고를 때는 글자 개수로 분류가 되어있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다. 업무시간의 반 이상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쓰인다. 단어는 변한다. 제대로 말하자면 단어가 변한다기보다는 사람이 변한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다. 데이터베이스의 낡은 정보들을 걸러내고, 여행사, 여행 관련 카페, 여행 장비 브랜드 서치를 하고 운이 좋다면 열 개 정도의 단어를 추가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일은 전화를 받는 일이다. 월간지의 대표번호는 내 자리로 연결되어 있을 정도로 날 찾는 전화가 많이 온다. 대부분 물음표로부터 온 전화였다. 다음 호까지의 한 달을 기다리지 못해 단어를 찾는 전화들. 느낌표를 달고선 항의를 하는 전화도 적지 않았다.
세로열쇠1. 고급 리조트나 호텔의 ‘집사’라고도 칭하는 사람. 객실 하나를 담당해 비서처럼 이용하는 고객들의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주시는 분.
○○○ 서비스.
지난 호의 세로 1번문제의 정답은 버틀러였다.
“정답이 지배인인 줄 알았어요. 보통 호텔의 지배인이라고 하잖아요. 나는 아직도 왜 정답이 버틀러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지배인인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1번 정답을 쓰고 보니, 더 이상 퍼즐을 풀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난 하루 종일 울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전화기에 대고 그 문제를 낸 것에 대한 미안함과, 십자말풀이를 풀지 못한 것에 대한 위로를 표했다. 퇴근 후 저녁을 먹으며 준에게 퍼즐을 풀지 못해 하루 종일 운 남자 이야기를 해주니, 준의 특유의 소리. 웃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남자를 비웃는 것인지, 같이 울어주는 것인지 애매했다. 목소리를 유지하며 울면서 그리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 했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의 약이 뭔지 알아? 피임약이야. 참 웃기지. 집에 있던 빨간 탁상 시계는 기상 시간도, 밥시간도 아닌 때에 울렸어. 여자가 약을 먹는 시간이었지. 막 짧은 문장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내가 옆에서 뭐냐고, 나도 달라고 쫑알대면 여자는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어.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라고 말이지.”
준의 과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가 아니면 남자였다. 모두에게 따로 호칭을 붙이지 않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준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중요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그 때의 여자는 준의 엄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여자가 없을 때, 실수 하지 않기 위해서 몰래 약을 먹었어. 물론 무슨 뜻 인진 몰랐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남자들에게 콘돔을 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나는 임신할 수 없을 테니까. 잘된 일이지. 나는 평생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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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먹으면 슈렉이 될 것만 같아서 싫다고 했던 브로콜리 죽이다. 내가 몇 시에 퇴근을 해서, 몇 시에 저녁 준비를 하든, 언제나 준은 저녁이 다 되어갈 때 쯤 나타나 메뉴에 핀잔을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나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준은 언젠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준은 오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이 없기에 내가 없는 시간에 준이 뭘 하고 지내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새로 추가한 단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세 달 연속 정답을 모두 맞췄는데 뭐라도 줘야하는 게 아니냐며 시끄러웠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준은 자신이 들은 처음의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여느 때처럼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였다. 얼핏 들으면 준의 처음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선녀와 나무꾼이 바뀌어 있었다. 선녀의 짐은 너무 무거워 날아가지 못하고 선녀와 짐이 무서워진 나무꾼이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
설거지는 준의 몫이었다. 준은 기분이 안 좋은 날엔 일부러 그릇을 깼다. 오늘의 그릇은 잠잠했지만, 갈치를 구워먹었던 날에는 밥이 담겼던 그릇과 갈치가 담겼던 접시가 깨졌다. 준은 기름 때문이었다고 했다. 갈치를 먹었던 그날은 준이 여자를 죽였던 이야기를 했던 날이다.
“여자와 나는 항상 싸웠어. 그래서인지 그날도 뭐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여자가 물을 떠달라는 말에 내가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돈 달라는 말에 여자가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시작이 어쨌든 우리는 싸웠고, 서로의 마지막 말만 기억나. 나는 여자에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고, 여자는 그래 죽어야 니 년 얼굴 안보지라고 했어. 그리곤 정말 여자가 죽어버렸어. 공사하던 포크레인에 깔려 죽었다고 했던가. 우리가 싸울 때 운석이라도 떨어진건가.”
준은 말을 마치고 나를 봤다. 울고 있는 나를 봤다. 그리곤 화가 난 얼굴로 기름을 닦아내지도 않은 그릇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준은 얼마 전 그날 깨진 그릇이 손톱 밑에 들어가 한동안 고생했다고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덧붙여 가까이 있을 때의 비극이, 멀리 오고 보면 희극이 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는 울지말라며 당부했다. 나는 비극과 희극의 시차에 대해서 생각하며 준이 과거의 이야기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 것도 같았다.
세 번째 글자가 ‘보’인 4글자 마지막 단어를 찾고 있다. 단어가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뻑뻑해져왔다. 사무실 서랍에 놓았던 인공눈물이 다 떨어져, 필통을 뒤적여 하나 남은 인공눈물을 찾아 넣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금방 마르기에 마감일이 다가오면 나는 인공눈물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어. 이게 내 첫 눈물이야.”
언젠가 저녁시간에 내가 넣는 인공눈물을 따라 넣어 본 준이 말했다. 누구나 태어날 때 한번은 울어라고 말하는 나에게 기억에 없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하지 않았냐며 질책했다. 준은 그 후로 내가 인공 눈물을 넣을 때 마다 빼앗아 넣으며 인공적으로라도 우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슬퍼지는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가로열쇠16. 조식 외에 한 끼의 식사를 더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조식+중식or석식)
조식과 중식과 석식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풀 보드라 한다.
마지막 문제의 답은 하프보드다. 세 번째 글자가 ‘보’인 4글자 단어. 마지막 단어까지 완성된 이번 달 십자말풀이를 인쇄했다. 파일을 넘기기 전 가장 먼저 문제를 풀어 보는 것은 준이다. 준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풀어냈다. 살짝 분한 마음에 일부러 어려운 문제만 낸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준은 평소보다 조금 어렵다는 말을 할 뿐 문제를 쉽게 풀어냈다. 그 덕에 나는 그달 내내 답을 달라는 전화를 받느라 애를 먹었다.
“전체적으로 문제가 너무 친절해. 특히 여기 마지막 하프보드 같은 경우엔 풀 보드에 대한 설명은 빼도 되지 않을까? 추가 설명 때문에 문제가 쉬워졌어. 없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준은 덜 익은 것 같다고 불평하던 김치 찜 속에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그래 빼야겠다라고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가져다 놓을 인공눈물을 찾으려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대량으로 구입해 놓은 일회용 인공눈물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준이 그릇을 헹구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방을 둘러보니 묘하게 달라보이기도 했고, 미세하게 준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남은 인공눈물의 수를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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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열쇠16. 조식 외에 한 끼의 식사를 더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조식+중식or석식)
준의 말대로 풀 보드에 대한 설명을 빼고 마지막으로 오탈자 점검을 한 후 파일을 넘겼다. 주6일 근무지만, 한 달에 한번 마감을 하고 난 다음날은 휴무일이었다. 서랍에 인공눈물을 채워 넣으며 준을 생각했다. 내가 없는 공간에서, 내가 없는 동안의 준은 어떤 모습일까.
퇴원을 하고 일 년 정도 지나 기억이 없는 삶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카레에 넣을 당근을 고르다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을 때 준이 나타났다. 다른 곳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머리카락이 딱 일 년치 정도 더 자란 모습의 준이었다.
“털어 낸다고 털어지나? 몇 살이라고 하고 다녀? 이름은 뭐라고?”
준은 기억이 없는 것을 감추고 살아가는 나를 조롱하듯 물어댔다. 그리곤 곧 상할 것처럼 제일 상태 안 좋은 당근을 집고선 내가 안 먹으면 누가 먹겠어라며 멋대로 장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상태 안 좋은 당근을 넣은 그 날의 카레는 의외로 맛있었고, 그날 이후 준은 멋대로 들어 온 당근처럼 우리 집에 살기 시작했다. 거실과 주방 그리고 방 하나의 집에서 준은 내 방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거실에 살기 시작했다.
“무슨 일 하고 있다고 했지? 낱말 퍼즐? 그래. 그런 거야. 너는 가로, 나는 세로. 가로는 가로의 이야기가 있고, 세로는 세로의 이야기가 있지.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가로 세로의 교집합이 우리가 되는 거야.”
왜 같이 살아야 하냐는 나의 질문에 준은 그렇게 답했다.
나는 우리의 처음 식사처럼, 가장 안 좋아 보이는 감자와 당근을 사들고 와서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를 볶고 카레 가루를 물에 개어내고 있을 때 준이 다가왔다.
“너무 묽은 거 아니야? 가루를 좀 더 넣어. 감자도 너무 크게 썬 것 같은데, 익긴 다 익은 것 맞아?”
그렇게 평소처럼 불평을 했다. 카레를 먹으며 나는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나타나는 과장님의 강박증과 김선배의 조울증에 대해서 말했고 준은 우리의 첫 식사에 대해서 말했다. 나도 이제 준의 과거가 되었다.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하지? 너는 가로고, 나는 세로라는 얘기 말이야. 그걸 이해하고 나를 들인 거야?”
내가 고개를 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으로 카레를 먹으며 그래도 그때보다 맛있다며 웃었다. 준-하고 길게 늘어뜨려 불렀다. 내가 없는 동안의 너는 어때라고 물었다. 처음 보는 준의 표정이었다. 인공 눈물을 넣고 난 후 같기도 했고, 뒷모습이라 볼 수 없었던 접시를 깨뜨리는 표정 같기도 했다. 준은 지금을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준은 그릇을 치우지 않고 쇼파에 드러누웠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 표정이었다면 남아나는 접시가 없었을테니까. 거실의 준과 부엌의 그릇을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났던 준의 향기가 더 짙게 났고 세어두었던 인공눈물의 숫자는 줄어들어있었으며 나가기 전 펴놓은 이불의 가운데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준과 내가 처음 만났던 병원이다. 하지만 프리지아가 있었던 그 방의 과거엔 나는 있었지만 준은 없었다. 2인실이었지만 환자가 다 차지 않아 혼자 병실을 썼다고 했다. 준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나는 퍼즐을 만들어야했다. 텅 비어있는 휴무일의 사무실에서 나는 평소처럼 퍼즐을 만들었다. 가로 그리고 세로, 그 것들의 교집합이 되는 새로운 단어. 준-.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의 손톱 밑이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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